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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붉은 머리 아이
#2 홀로서기
루에리가 티르코네일에 온지도 어느새 벌써 2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하루종일 학교에서 검술 연습에 매진하는 게 일상이었지만, 근근이 마을 주민들을 돕기도 하며 마을에 서서히 정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가장 처음 만난 타르라크와도 이젠 말도 터놓을 정도로 꽤 친근한 사이가 되었는데, 그 중심엔 마리라는 소녀가 있었다.
마리는 티르코네일의 촌장인 던컨과 사는 소녀였는데, 불의의 사고로 가족과 기억을 잃고 던컨에게 거두어졌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의 일을 돕다보면 자연스레 촌장인 던컨의 집에 자주 들리는 터라 루에리는 마리와 마주치는 일이 잦았고, 자연스럽게 둘은 금방 친해졌다. 그리고 마리를 거의 여동생처럼 생각하며 돌보던 타르라크 역시 점점 같은 나이이기도 한 루에리에 대한 경계를 풀고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루에리가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한 지 딱 2달이 된 날, 타르라크에게 말 놓기를 부탁을 했다. 타르라크는 마지못해 말을 놓았고, 루에리는 이제 좀 편하다며 활짝 웃었다. 둘이 말을 트기 시작하자, 그동안 발전이 없었던, 타르라크가 하고 있는 연구에도 진척이 생겼다. 검은 거의 사용한 적이 없어서 혼자 던전을 들어가기엔 무리가 있었는데, 근거리를 맡는 루에리와 자신의 시전속도를 커버해줄 마리 덕분에 그런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루에리는 타르라크가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굉장히 기뻐했다. 물론 타르라크는 그저 그게 루에리의 오지랖 넓은 성격때문이라 생각하고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그리고 그 날도 타르라크는 두 명을 데리고 조금 먼, 던바튼 근처의 마스던전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루에리는 진짜 힘 빼면 남는 게 없는 거 같아.”
“뭐라고?”
“타르라크도 깜짝 놀랐는 걸. 코볼트를 그렇게 들쳐없고 던져버릴 줄이야...”
아까 전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티르코네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타르라크가 앞장서서 걷고, 루에리와 마리가 서로 티격태격하며 뒤를 따라왔다. 그러다 한창 저녁이라 나무꾼들도 없는 두갈드 아일 벌목캠프를 막 지날 때였다.
“루...에리...?”
누군가 루에리를 불렀다. 루에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루에리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벌어진 입은 신음처럼 자신을 부른 상대의 이름을 내밷었다.
“아...이던...”
*
갑작스런 불청객에 셋은 티르코네일에 다다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루에리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던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가버렸다. 사라지는 둘을 보며 마리는 묘하게 눈을 반짝였고, 타르라크는 예전에 한 번 루에리와 자신만 키아던전에 갔을 때 떠올렸다.
그 날은 평소에 쓰던 크루타 브로드소드를 수리하러 대장간에 맡기고 대신에 롱소드를 들고 갔던 날이었다. 임시로 가져온 무기라 손에 익지 않은 롱소드를 휘두르던 루에리는 그만 그 롱소드를 부러뜨리고 하는 수 없이 맨손으로 싸우다 부상을 당했더랬다. 다행히 던전 난이도 자체는 그렇게 높지 않아, 타르라크가 보스까지 어렵지 않게 해치웠고(대신 반은 폼으로 들고다니던 류트는 엉망이 되었다.), 보스가 쓰러지자마자 타르라크는 보스방 구석에 불을 피우고 루에리를 치료했다. 그 때 루에리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치료를 받는 동안 평소에 절대 하지 않던 자신의 얘기를 조금 했었다.
「내가 남쪽 출신인 건 말했었나?」
「어. 했던 거 같다.」
「그랬구나. 음...그래. 나 실은 가출했어. 거기가 싫어서.」
루에리가 말하길 남부럽지는 않게 살았지만, 그닥 즐겁지도 않았던 생활이었다고 했다. 더군다나 자신이 무언가 노력을 해도 이미 정해진 운명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 곳에서 그나마 이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자신을 항상 걱정해주던 친구와 자신이 돌봐야했던 동생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한텐 내가 없는 게 나아. 위험하면 언제든 가준다고 동생에게 약속했지만, 내가 바로 동생한텐 위험한 존재니까. 그리고 친구한테는...」
이야기를 이어가다 멈춘 루에리의 얼굴에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어두움이 깔려있었다. 타르라크는 무언가 말하려 입을 달싹였지만, 이내 입을 닫았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말하든 루에리에겐 전혀 위로도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묵묵히 치료를 끝냈고, 루에리는 치료가 끝나자마자 본연의 밝은 얼굴로 돌아왔었더랬다.
“친구...쪽인가...”
전혀 닮지 않은 외모, 하지만 닮은 분위기. 아마도 루에리가 전에 말하던 그 ‘친구’겠지. 타르라크는 아까 전 그를 만났을 때의 루에리의 표정을 떠올렸다. 당황하면서도 반갑고, 기쁘면서도 슬펐던, 말 그대로 복잡한 얼굴. 타르라크의 머리속에 문득 그 ‘친구’의 존재가 궁금해졌다. 루에리에게 그는 어떤 의미인지.
*
아이던을 데리고 집으로 먼저 사라진 루에리는 들어오자마자 등불부터 붙이고 거실에 아이던을 앉혔다.
“여기 있어. 뭐 마실 차라도 가져올테니까.”
“루에리.”
그러나 아이던은 서둘러 부엌으로 가려는 루에리의 손목을 붙잡고 자신의 쪽으로 돌아보게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루에리는 반항할 틈도 없이 아이던에게 잡힌 상태가 되었고, 뒤늦게 빠져나가려고 손을 비틀었지만, 아이던의 강한 힘에 헛수고일 뿐이었다. 결국 힘을 풀고 얌전히 기다리자, 아이던은 루에리의 손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히 말했다..
“보고싶었어.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져서 걱정했잖아.”
“...”
단순한 말임에도 루에리는 목이 콱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떨군 채 자신의 손을 어루만지는 아이던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루에리. 오랜만에 봤는데 나 안 볼거야?”
아이던의 말에 루에리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이던의 두 눈에 루에리의 서글픈 표정이 들어오자, 그는 충동적으로 루에리를 끌어안았다. 아이던의, 자신을 향한 감정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던 루에리는 그의 행동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어지간해서 감정의 선을 넘지않는 그의 성격을 잘 알고있는 터라 적지않게 당황했다. 루에리는 얌전히 안긴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무슨 일 있었어?”
아이던은 대답대신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루에리에게 물었다.
“돌아오지 않을...거야?”
“...”
루에리는 아이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던은 그 침묵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답이 무엇이든 관계없다는 듯 루에리의 손을 꼭 잡으며 결연하게 말했다.
“너가 돌아올 생각이 없다면 내가 너의 곁으로 갈게.”
그 말에 루에리는 아이던의 말에 몇 해 전에 그가 했던 맹세를 기억했다. 드디어 아이던이 기사칭호를 받게된 날이었다. 그는 칭호를 받자마자, 루에리의 방으로 뛰어왔었다. 그리고 연무장이 보이는 창가에 기대어 앉아있는 루에리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나, 아이던 클리어크는 명이 다하여 죽는 그 순간까지 나의 주인, 루에리 이디어에게 제 목숨을 바쳐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그리고 루에리에게 자신이 하사받은 검을 쥐어주면서 다시 기사의 맹세를 했다. 그리고 섬김의 표시로 아이던이 손등에 입술을 맞추자, 루에리는 검을 부여잡고 펑펑 울었다. 남들이 보기엔 별거 아닌 그저 맹세였지만, 기댈 곳 없는 쓸쓸한 이 성에서 루에리에겐 그 맹세가 정말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루에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날의 맹세는 그 날의 것. 루에리는 자신 하나 때문에 소중한 이의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아이던을 말렸다.
“하지마. 아이던. 그러지마.”
“아니. 갈거야. 너한테로. 네”
재차 함께 있겠음을 다짐하는 아이던의 목소리엔 절박함이 묻어있었다.
“하지만 너가 이멘 마하를 떠날 리가 없잖아. 너에겐 무엇보다도 소중한 게 이멘 마하잖아.”
“아니. 내게 소중한 건 너가 다스리는 이멘 마하야. 너가 사는, 너가 좋아하는 이멘 마하를 지키기 위해 근위대를 지원한 거야.”
아이던의 묵직한 고백이 루에리의 마음을 눌러왔다. 그의 감정을 모르고 있던 건 아니였지만 그 감정의 크기가 이토록 무거운 건지는 알지 못했던 루에리였다. 결국 루에리는 그 묵직한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돌려버렸다.
“아이던, 난 받아줄 수가 없어. 제발...이러지마. 나는...나란 존재는...”
루에리의 눈엔 결국 눈물이 넘쳐 흘렀다.
한때는 그저 평범하게 살길 희망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자리를 줄 생각이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기에, 자신을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오랜 친우에게 기대어 평범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루에리에게는 사치였다. 그래서 그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루에리는 힘껏 아이던을 밀어냈다. 더이상 자신에 대한 아이던의 마음이 커지지 않게. 그래서 떠나왔다. 더이상 자신의 동생과 아이던의 삶이 자신으로 인해 망가지지 않게. 그렇게 루에리는 아이던과 자신, 둘 모두에게 잔인한 선택을 했다.
“난 두 번 다시 널 보지 않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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