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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붉은 머리 아이




#1 인연의 시작




따뜻한 햇살이 가득한, 한적한 오후,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풀밭에서 두 아이가 목검을 맞대며 대련을 하고 있었다. 둘 모두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이나 검을 맞부딪혔다. 양 쪽 모두 실력이 엇비슷한지 좀처럼 나지 않을 것 같은 대련은 붉은 머리의 아이가 발을 헛디디면서 끝이 났다.


“으악!”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붉은 머리의 아이가 검을 놓치고 풀밭을 굴렀다. 은색 머리의 아이가 그 모습에 당황해 곧장 들고 있던 검을 내팽겨치고 달려왔다.


“괜찮아, ‘루에리’?”

“응. 에이...조금만 더 하면 이길 수 있었는데.”

“그런 소리말고.”

“그렇지만 조금 있으면 난 ‘아이던’한테 이기기 더 어려워지는걸...”


루에리라 불린 붉은머리 아이가 아이던이라 불린 은색머리 아이를 향해 툴툴댔다. 그러자 아이던은 루에리 옆에 털썩 앉았다. 


“모르는 일이지. 모든 일은 체격이나 힘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거든. 때로는 머리를 써서 이길 수도 있고, 운이 따라줘서 이기는 경우도 있지.” 


루에리는 한숨을 푹 쉬더니 풀밭에 벌렁 드러누웠다. 때마침 산들바람이 불어와 땀이 맺힌 두 사람의 이마를 훑고 지나갔다. 한참을 바람을 느끼며 누워있던 루에리는 입을 열었다.


“그걸로도 안 되는 게 있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응?”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아이던은 루에리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해서 되물었지만, 루에리는 들릴듯 말듯하게 ‘운명같은 거...’라고만 말한 뒤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운명(destiny)’.

루에리는 본래 운명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노력 자체를 부정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어느샌가 자신에게 따뜻한 눈빛을 제대로 주지않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자신이 너무 불쌍하게 여겨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어느정도는 인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빌어먹을 ‘운명’이란 것을...


‘그 아이에겐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네. 그건 나조차도 어쩔 수 없는 일...’


그래. 그걸 듣지 말았어야 했다. 루에리는 후회했다. 차라리 몰랐다면 지금 이런 비참한 기분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걸 알고 있던 자신의 아버지는 무던히도 노력하는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그 옆에서 또한 지켜보던 에스라스는 어떤 얼굴로 자신을 봤을까. 루에리는 겨우 버티고 서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루에리?”


한참을 속절없이 파랗기만한 하늘을 바라보던 루에리는 아이던의 부름에 현실로 돌아왔다. 아이던의 걱정스런 눈빛을 발견한 그녀는 이내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평소와 다름없이 가면을 썼다. 그리고 태연하게 말했다.


“늦었다. 돌아가자.” 


옷 여기저기에 붙은 풀을 탈탈 털어내며 일어난 그녀는 떨어진 목검을 챙겨들었다. 아이던은 벌떡 일어나 루에리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행동에 놀란 루에리가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도 불구하고 아이던 자신은 도무지 무슨 말을 해줘야하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아이던...?”


루에리가 조심스럽게 아이던을 부르자, 아이던은 자신의 두 손으로 루에리의 손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네 편이야. 어느 순간이든...항상...” 


루에리는 아이던에게는 보이지 않게 쓴 미소를 지었다. 


“응...고마워.”


그리고 그 날로부터 4일 뒤 루에리는 쪽지 한 장을 남긴 채 이멘마하를 떠났다. 

 

*


“작지만 활기차고 좋은 도시...그렇지만...”


이멘마하를 떠나 온 지 6일 째 되는 날. 루에리는 던바튼이란 도시에 발을 들였다. 산으로 나있는 오솔길을 거치면 한 나절이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길 자체가 험한데다가 최근 사나운 포워르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말에 센마이평원으로 빙돌아오는 방향을 택했더니 5일이나 더 걸려버렸다. 그러나 원래 계획조차 없이 그저 가장 간단한 장비와 적지도 많지도 않은 여비, 그리고 자신이 아끼는 검 하나 들고 생각을 정리하며 첫 목적지를 향해 가는 거라, 걸리는 시간을 그닥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단은 배부터 채워야겠군. 그 다음은 힐러집.”


배고프다 요동치는 배를 부여잡고, 루에리는 먼저 마을의 식료품점을 찾아갔다. 거기서 간단하게 허기를 달랜 루에리는 아버지 방에서 몰래 가져왔던 지도를 가방에서 꺼냈다. 


“자...어디보자...여기 근처에 티르코네일이란 마을이 있다 들었는데...”


북쪽 끝 작은 시골마을, 티르코네일(Tir co nail). 루에리의 첫 목적지는 거기였다. 남쪽도시인 이멘마하와도 꽤 거리가 되는데다가 시골마을이라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해 루에리가 정한 곳이었다. 하지만 북쪽 지방 지리는 잘 모르는 탓에 루에리가 지도에 코를 박을 기세로 열심히 길을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하얗고 길다란 손이 나와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여기서 북쪽.” 


루에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금발에 초록눈을 한 루에리와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고마워.”

“천만에...”


그 소년은 딱 그 말만 하고 얼떨떨한 루에리를 뒤로 한 채 바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루에리는 멀뚱멀뚱 그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는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다행히 그는 그리 멀리가지 않아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이...이봐요! 잠깐만!”


루에리가 간신히 그의 소매를 잡아채 그를 멈춰 세웠다.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뛰어 오느라 헉헉대는 루에리를 쳐다보았다. 


“뭐죠?”


그의 물음이 돌아왔지만 루에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그저 본능적으로 달려온 터라 딱히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가 적당히 할 말을 찾아 머리를 굴리자, 그는 할 말이 없으면 가겠다는 말과 함께 발길을 돌렸다.  


“아...아니! 잠깐만. 저기...그러니까...그게...이름이 뭐야?”


자신의 물음에 그의 눈동자가 동그래지자, 루에리는 민망했다. 본인도 거의 반사적으로 뱉은 말이지만 자신이 생각해봐도 뭔가 어처구니 없는 물음이어서 속으로 자신을 타박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물을 땐 본인의 이름부터 밝혀야하는 게 예의 아닙니까?” 


다소 날이 선 목소리에 루에리는 살짝 주눅이 들어 기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루...루에리.”

“타르라크입니다.”


그러자 그도 순순히 자신의 이름을 말해줬다. 루에리는 그의 경계가 풀렸다 생각했는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웠다.


“저 혹시 티르코네일 사람이야?”

“그렇습니다만.”


한편 타르라크는 자신의 반응에 따라 얼굴이 수시로 바뀌는 상대를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낯선 사람에 대한 거리감은 풀지 않고 있었다. 그 증거로 지금 티르코네일로 갈 예정이면 같이 가자는 제안에 선뜻 긍정의 표시를 내비쳤음에도 두갈드 아일의 벌목캠프가 보일 때까지 그저 루에리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이따금씩 묻는 말에 단답으로 대답하는 게 전부였다. 


“그나저나 마법사라니...대단하다. 난 그쪽 계열은 어려워서 아예 배우는 걸 포기했는데.”

“그저 적성에 안 맞는 겁니다.”

“그런가...아...그러고보니 나 손재주도 서툰 편이라 붕대감는 것도 힘들어했어. 그래서 응급치료 스킬 같은 건 거의 손도 안 댔지. 아주 기본적인 정도 밖에 못해. 덕분에 내 친구는 여기 구르고 저기 구르고 하는 날 치료해주느라 거의 마스터했다니까.”


루에리는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어느샌가 자연스레 타르라크의 말 길이도 늘어있었다. 


“작은 시골마을이라고 해도 힐러집, 학교, 대장간, 은행, 식료품점 같은 건 다 있습니다. 당신이 어디서 살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작지만은 않아요.”

“학교? 학교도 있는거야?”

“네, 가르치는 건 마법이랑 검술 밖에 없지만...선생님들은 꽤 좋은 분이십니다. 실력도 좋고.”

“우와...그 검술 선생님 한 번 만나봐야겠다.”


두 사람이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티르코네일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다 저물고, 작은 시골길 사이사이로 가로등이 어슴푸레 빛을 내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타르라크가 광장 바로 앞 식료품점에 잠시 들어간 동안 루에리는 작은 광장 한 구석에 잠시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 쉬고 있었다. 몇 안되는 집들 지붕 위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작은 마을. 루에리는 소박하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이 곳의 저녁 풍경이 맘에 들었다. 잠시 앉아서 그 풍경을 감상하고 있자, 타르라크가 식료품점에서의 볼 일을 다보고 나와, 루에리에게 작은 빵을 건넸다. 두 사람은 광장 계단에 나란히 앉아 잠시 늦은 저녁을 해결했다. 그리고 곧 빵을 다먹은 타르라크가 자신의 가방을 들처메었다.


“여기까지 안내해드리면 되나요?”

“어...엉. 저기 언덕 위가 촌장님 댁이고 저 아래쪽에 여관이 있다고?”

“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그러고는 루에리가 감사의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타르라크는 언제 같이 왔냐는 듯 그대로 휑하니 가버렸다. 루에리는 흔들다 만 손이 머쓱해서 괜시리 머리만 긁적거리다가 자신의 짐을 들었다. 일단 늦었으니 여관에서 짐을 풀고 생각해보자. 이 마을의 촌장은 내일 찾아가기로 결정하고 루에리는 여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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